스님의하루

2024.4.13 한국 도착, 영어 즉문즉설, 공동체 봄나들이
“이혼 후 사춘기 자녀가 연락을 끊어서 슬픕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탄 답사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서 다시 일정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어젯밤 10시 20분에 비행기를 타고 방콕 공항을 출발하여 오늘 새벽 6시에 인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하늘 위에서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서울 정토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하여 짐을 내리고 세면을 한 후 곧바로 아침 8시부터 외국인을 위한 영어 즉문즉설 생방송을 했습니다. 오늘은 북미 동부, 북미 서부, 캐나다, 인도, 호주, 한국의 10개 그룹에서 영어 정토불교대학 수업을 듣고 있는 31명의 학생들이 함께 했습니다.

몇몇 학생들의 수업 소감을 듣는 시간을 가진 후 스님과의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부탄을 답사하고 온 내용을 공유해 주었습니다.

“저는 지난 일주일 동안 부탄에 있다가 오늘 아침에 도착했습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기 위해 부탄 정부와 협력해서 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 시대에 CO₂ 제로의 삶을 산다면 어떤 삶이 될 수 있는지 그 모델을 만들기 위해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의 모습을 만들어 보고자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앞으로 100년 뒤를 생각하면 기후 위기가 점점 더 심해지고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대안적인 삶과 문명을 지금부터 미리 마련해 두어야 합니다.

왜 부탄을 선정했는지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현재 부탄은 세계에서 CO₂ 배출이 마이너스인 세 개의 국가 중 하나 입니다. 물론 부탄도 지역별로는 많은 차이가 납니다. 부탄의 서부 지역인 수도 팀푸나 공항이 있는 파로 지역은 이미 개발이 많이 되어 있고, 외부 관광객이 많아서 현대적인 모습을 아주 많이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부나 중부 지역은 아직도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열악한 생활 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이란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첫째, 자기가 자기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자립’이 가능한 생활이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삶이 지구를 파괴하거나 해치지 않는 CO₂ 제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생활이 불편할 수는 있지만, 공기가 맑고 물이 깨끗하고 자연이 아름다운 곳에서 여유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탄에 와서 한 달 살아보니 ‘불편하지만 살만하다’ 이렇게 될 때 지속 가능한 개발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불교대학에 다니고 있는데, 왜 스님이 교과에 관한 질문을 먼저 받지 않고 이런 얘기를 할까?’ 하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교과 과정에서 배우는 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런 식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수행이란, 첫째, 자기가 괴롭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나를 도와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삶, 이것이 수행의 목표인 ‘보디사트바’의 길입니다.”

이어서 스님이 부탄을 답사하고 온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 영상 보기

영상을 보고 나서 대화를 이어 나갔습니다. 여섯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질문을 했는데요. 그중 한 명은 이혼을 하고 난 후 사춘기 자녀가 연락을 끊어서 슬프다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이혼 후 사춘기 자녀가 연락을 끊어서 슬픕니다.

“After a divorce, my adolescent children have decided to live with their father and have cut all contact with me. It has been 6 years. It came a lot to me at the beginning. But eventually, I was able to find some meaning in my life. I realize I have many blessings and nothing to complain about. But it is always sad for me not to be a part of their lives. How can I overcome this?”

(이혼 후 사춘기 자녀가 아버지와 함께 살기로 결정하고, 저와의 연락을 모두 끊었습니다. 6년이 지났어요. 처음에는 매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제 삶에서 의미를 찾았고, 감사할 일이 많았으며, 불평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삶에 일부라도 함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항상 저를 슬프게 만듭니다.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부모가 아이를 위해 존재합니까, 아이가 부모를 위해 존재합니까?”

“I think a parent exists for a child.”
(부모가 아이를 위해 존재합니다.)

“아이가 부모를 더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부모의 역할은 끝이 납니다.”

“Yes it is.”
(네,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질문자는 자식이 부모를 위해 존재하기를 바라는 걸로 보입니다.”

“I mean, I just want to be a part of their lives even if I hear the bad news about them.”
(저는 단지 좋든 나쁘든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들의 삶에 작은 부분이라도 함께하고 싶어요.)

“그건 본인의 요구입니다. 그렇다면 자식과 부모의 역할을 바꿔야 합니다. 당신의 아이들이 부모이고, 당신은 지금 자식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이렇게 좀 해주세요!’ 이렇게 아이들한테 부탁하는 거예요. ‘내가 보고 싶으니까 나를 보러 좀 와라!’, ‘내가 맛있는 걸 해주고 싶으니, 어서 와서 먹어라!’ 이렇게 전부 나를 위해서 자식이 필요한 겁니다.

그동안은 자식들이 원했고 자식이 생활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부모가 도와준 거예요. 그러나 자식이 스무 살이 넘으면 도와줄 의무가 없습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이라도 아이들이 필요 없다고 하면 내 임무는 끝난 거예요. 그러니 질문자의 역할은 이제 끝난 겁니다. 자식들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런 죄책감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질문자는 본인 인생을 살아가면 됩니다. 만약 자식에 대한 미련이 있다면, 그것은 마치 애완용 동물을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되찾으려는 것과 같은 본인의 요구입니다. ‘나를 위해서 내게 와!’ 이런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욕망이지 부모의 역할은 아닙니다. 부모의 역할은 끝난 거예요. 만약 질문자가 같이 놀 사람이 필요하면, 강아지를 키우거나, 다른 남자를 하나 구하거나,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다른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면 됩니다. 이렇게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은 자유예요. 그런데 지금처럼 자식들이 싫다는데 계속 접근하면 그것은 추행이 됩니다. 접근 금지 명령이 떨어질 수 있어요.

내 역할이 끝났으니 기뻐해야지 왜 슬퍼합니까? 이런 것을 집착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이는 더 이상 질문자가 필요 없다고 하는데 질문자가 자꾸 ‘내가 필요하지?’ 이러면서 자식들을 위한다는 핑계로 내 욕망을 자꾸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집착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것은 본인에게 고통을 주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맛은 있지만 건강을 해치는 음식이 있다고 합시다. 그것을 먹고 싶어 하는 것이 이해는 되지만 그것을 먹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인 것과 같습니다. 당신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당신은 이제 자유롭게 당신의 인생을 살면 좋겠습니다. 자꾸 조그만 아이를 데리고 놀려고 하지 말고 큰 어른 남자를 사귀어서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Thank you, Sunim. What I struggled with most was guilt. However, there is no need for me to feel guilty about my concern. If the children do not need me, that is also a positive outcome.”
(감사합니다 스님. 저를 더 힘들게 했던 게 바로 죄책감이었습니다. 이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괜찮고 좋은 일이니까요.)

“아이들의 결정을 존중하세요. 아무런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인생을 멋있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아이들의 결정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나를 일찍 해방시켜 줘서 고맙다. 앞으로 너희가 필요할 때 연락하면 도와줄게’ 이런 마음을 갖는 게 필요합니다. 엿처럼 끈적거리게 살지 말고 쿨하게 사세요. 쿨하게 ‘땡큐!’ 하고 탁 놓아버리세요. 내 아이들이 본인 나름대로 선택한 것을 믿어 주어야 합니다. ‘네가 현명한 선택을 했구나!’ 이렇게 인정해 주세요.”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고 나니 9시 30분이 넘었습니다.

스님을 찾아온 손님이 기다리고 있어서 평화재단으로 향했습니다. 외국에서 찾아온 손님과 30분 간 미팅을 한 후 10시 10분에 서울을 출발해 충주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공동체지부 활동가들과 봄나들이를 하는 날입니다. 전국이 대부분 벚꽃이 졌지만 충주는 내륙 산간 지방이어서 그런지 벚꽃이 이제야 만개를 했습니다.


서울과 문경, 두북 수련원에서 출발한 대중들은 오전 10시에 단양 도담삼봉에 도착하여 봄나들이를 시작했습니다. 도담삼봉을 관람하고 점심을 먹은 후, 청풍 문화재 단지를 둘러보고, 덕주산성으로 향했습니다. 곳곳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흩날렸습니다.

스님은 오후 2시에 덕주 산성에 도착하여 공동체 대중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스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잘 지냈어요? 저는 부탄 답사를 마치고 오늘 아침에 도착했습니다.”

대중은 삼배로 스님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산성이 만들어진 배경과 이와 관련된 역사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습니다.


걸어서 10분을 이동하자 사자빈신사지 석탑이 나타났습니다. 이 석탑은 빈신사 터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 탑으로 상층 기단부에 사자 네 마리를 배치하여 탑신을 받치고 있는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네 모서리에 한 마리씩 배치한 사자는 사방을 경계하듯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네 마리의 사자상 한가운데 비로자나 불상을 모셔두었습니다. 당시 거란족이 빈번히 고려를 침입하였기에 이 탑은 불력으로 거란족의 침탈을 막아 태평민안을 기원하고자 세운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세한 설명을 들은 후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차에 올라탔습니다.

차로 15분을 달려 충주 미륵대원지에 도착했습니다. 다 함께 석조여래입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거대한 돌을 이용해 석굴을 쌓은 후 불상을 모신 곳인데,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었습니다. 위에 목조건물이 있었던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스님과 공동체 대중들은 불상을 참배한 후 이곳에서 국란 위기 극복을 염원했던 선조들의 마음을 새기며 잠시 명상을 했습니다.

명상을 마친 후 스님이 이곳 유적지에 얽힌 역사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현실이 너무 괴로워서 이상 세계를 추구했는데 그 세계를 ‘정토’라고 합니다. 그런데 살아서는 이상 세계를 이룰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이생에서는 괴롭게 살더라도 다음 생에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해서 사후 세계를 꿈꿨습니다. 당시 사회는 계급차별과 성차별이 심한 사회였기 때문에 평등이 보장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후 세계인 다음 생에는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 정토에 태어나 살고 싶어 했습니다.

불국정토의 대표적인 곳이 서방 정토 극락세계입니다. 서방 정토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분이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래서 정토 신앙과 관음 신앙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신앙은 소극적인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 달리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진 신앙도 있었습니다. 죽어서 다음 생에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보다도 내가 사는 이 세상이 정토가 됐으면 좋겠다는 신앙입니다. 즉, 내가 부처님이 계시는 저 세상으로 가는 게 아니라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정토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신앙이 생겨나게 됐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륵 신앙입니다. 저 멀리 다른 세계에 있는 아미타 부처님도 아니고, 이미 지나가 버린 옛날의 석가모니 부처님도 아니고, 우리를 행복하게 이끌어 줄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 부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현재는 미륵 보살로 있지만 앞으로 성불하셔서 미륵 부처님이 되시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바로 정토가 된다고 믿은 것입니다. 미륵 신앙은 현실에서 억압을 받는 사람들이 미래 정토를 꿈꾸며 믿었던 혁명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즉, 피지배자들의 해방을 염원했던 신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부처님을 섬기고 복을 비는 신앙은 대부분 기득권자들의 신앙이었습니다. 현재도 잘 살고, 죽어서도 잘 살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고 사후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도 물론 사후 세계를 꿈꾸긴 했지만 그들은 자기가 사는 이 세상에서 평등성이 실현되는 세상을 이루면 좋겠다고 바랐습니다. 자신의 염원을 담아서 산이나 들녘 곳곳에 미륵불상을 새겼습니다. 그래서 미륵불상이 건물 안에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몇몇 큰 절에 미륵전이 따로 있어서 미륵 부처님을 모시는 경우가 있지만 대다수 미륵 불상은 산이나 들녘에 새겨져 있습니다.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을 이루기를 꿈꾸었던 사람들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미륵 신앙은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습니다. 신라 말에 신라가 분열되고 혼란스러울 때 미륵 신앙이 일어났고, 자칭 내가 미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나타났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궁예였습니다. 그러나 궁예의 횡포에 실망을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왕건이라는 인물이 미륵에 더 가깝다고 보았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거란과 몽골의 외침이 있었을 때 전 국토가 유린을 당했습니다. 그때 외침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염원으로 미륵 신앙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 지배 계급의 착취가 심해져 삶이 고통스러워지자 미륵 신앙이 다시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후 미륵사상의 후예들이 종교적인 특성에서 벗어나서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며 일으킨 것이 동학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불교 안에서 태동한 혁명적인 사상이 바로 미륵신앙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외부에 노출되어 있는데요. 원래 석굴이었습니다. 석굴암과 유사한 방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윗부분이 덮개로 덮여 있었고, 앞에는 전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에 타서 다 사라져 버리고 현재 이런 모양만 남게 된 겁니다. 그러니 석불형 불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미륵불은 보통 들판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미륵불을 주불로 모신 하나의 절이었습니다. 통일 신라 시대의 영토를 기준으로 하면 이곳이 가장 중심이었습니다. 한반도 전체에서 보면 남쪽에 치우쳐 있지만 통일 신라 시대에는 이곳이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중원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몸에 비유하면 배꼽에 해당합니다. 이런 이유로 이곳은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앞이 탁 트여있지만 다시 안산이 막아주고 있습니다. 좌청룡 우백호가 양옆으로 펼쳐져 있어서 신비로움이 느껴집니다.

국민 통합과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며

정토 세계를 지향하고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을 이루겠다는 꿈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이곳에 모여서 절을 짓고 기도하며 발원했던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간절한 꿈은 동학농민혁명 사상으로, 3·1 독립 운동으로, 그리고 4·19 혁명으로 면면이 이어져 왔습니다. 우리 민족사의 뿌리가 되는 역사의 현장을 참배하기 위해서 우리가 시간을 내어 이곳에 온 겁니다. 오늘 봄나들이는 그냥 소풍이 아니에요.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지키고, 나라가 사분오열되는 것을 막아 우리나라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자는 원을 세우기 위해서 우리가 이곳에 왔습니다. 하늘에 빌고 막연히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인이 되어 그런 나라를 세워보자는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후손을 위해서 또 우리 선조들의 원을 우리 대에 와서 성취하자는 의미에서 이곳을 참배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님의 제안으로 ‘미륵존 여래불’을 108번 염송 하면서 한반도의 평화, 국민통합 그리고 지속적인 국가 발전을 함께 발원해 보았습니다.


미륵대원지를 나와 다시 차에 올라타고 문경 선유동 연수원으로 향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국태민안을 꿈꾼 선조들의 마음을 가슴에 새기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발원해 보았습니다.


선유동 연수원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를 한 후 7시 30분부터 스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70여 명의 대중이 스님에게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이 편안하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오늘 구경을 잘했습니까?”

“네!”

“경주에 갔으면 벚꽃도 지고, 진달래도 져서, 봄이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을 텐데, 이곳은 소백산 산간 지방이어서 그런지 벚꽃도 한창이고, 여러 가지 꽃들도 많이 피어 있었습니다. 저도 함께 한국의 봄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어서 이번에 새로 법사 수계를 받은 분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분씩 법사가 된 소감을 말한 후 모두 큰 박수로 축하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다음은 부탄에서 20일 동안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을 하고 오늘 아침에 귀국한 네 명의 활동가들이 앞에 나와 다녀온 소감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명씩 무엇을 느꼈는지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오늘 한국에 도착하니까 눈물이 났어요. 차를 타고 오면서 창밖을 보는데 도로가 잘 만들어져 있고, 곳곳이 많은 사람들의 노고로 정비가 잘 되어 있는 모습을 보니까 선조들한테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스님께서 첫발을 내딛으셨고, 이제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부탄 지속가능한 개발 프로젝트인 것 같아요. 제가 그 일원이 된 것이 참 뿌듯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을 주민들이 변화해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신나게 놀 수 있는 일감이 주어져서 감사했습니다.”

“부탄 사람들을 도와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부탄 사람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동기 부여를 해주려고 왔다는 스님의 말씀이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각자 역할은 달랐지만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고생한 도반들을 위해 큰 박수로 격려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어서 궁금한 점을 묻거나 사업에 대한 제안을 자유롭게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미리 서면으로 신청한 질문이 2개였습니다. 사전에 신청한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한 후 즉석에서 자유롭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스님과 몇몇 활동가들이 부탄을 답사하고 왔기 때문에 JTS 사업과 부탄 사업에 대한 질문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한 명은 부탄 사람들도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싶은 욕구가 있어 보이는데 지속가능한 개발을 하려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부탄 사람들도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싶지 않을까요?

“저는 스님께서 하고 계신 부탄에서의 지속 가능한 개발 사업을 보고 듣고 가슴이 뛰고 기대가 됩니다. 부탄을 답사하고 온 모습을 영상으로 보니까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법문을 주민들에게 하신 후에 주민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보니까 ‘주는 것은 다 받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스마트 TV가 필요하다고 요청하는 모습을 보니까 부탄 사람들도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고 싶은 바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껄떡거림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부탄 사람들도 풍요로운 삶이나 본인들이 아직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기대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을 하려면 이런 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부탄 사람들도 그런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지원 원칙은 기본적인 생활에 대한 부분은 지원을 하지만,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부분은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런 삶을 좇는 것은 그들의 자유니까 각자가 선택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부분을 지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현지 답사를 할 때도 그들의 요구를 들어보고,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면 지원을 하고, 그걸 넘어서는 문제는 본인에게 맡깁니다. 그게 좋아서 하는 건 그들의 문제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하라, 하지 말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보고, 생활수준 하위 20 프로 범위 내에서 필요한 부분이라고 판단되면 지원을 하고, 그 이상은 각자에게 맡기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집을 고쳐 달라는 요구가 있을 때도 집 안에 들어가서 둘러보고, 만약 찬장도 있고, 전기밥솥도 있고, 깔끔하게 조리 기구도 갖춰져 있는데 무언가를 더 요구하면 그건 우리가 지원하는 부분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그냥 나옵니다. 반면, 집을 둘러보는데 여기에서는 살기 힘들겠다는 판단이 들면 개선을 해줍니다. 집에서 잠을 자는 환경을 살펴보니 바닥에 천 하나 깔아 놓고 자고 있다고 합시다. 우리한테 그렇게 살라고 해도 하루 자는 건 몰라도 계속해서 그렇게 살기는 힘듭니다. 그렇게 기본적인 잠자리는 마련되어 있는지, 물은 공급되는지, 전기는 들어오는지, 마룻바닥이 있어도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인지 등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부분을 점검합니다.

이번 답사 때는 JTS 활동가들과 함께 마을의 빈집에 머물며 생활을 했는데, 처음에는 다들 스님의 눈치를 보느라 별말을 안 했지만 다들 표정이 ‘여기서 어떻게 살라고 하는 건가’ 하는 눈치였어요. 바닥에 깔 것도 없고, 조리 도구도 아무것도 없는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전깃불이 들어오도록 연결하고, 수도꼭지를 연결해서 화장실에 물도 나오게 하고, 나무판자를 구해서 우선 그 위에 밥이라도 얹어 먹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곳에서 장기적으로 지내려면 더 많은 부분을 손 봐야 할 거예요. 이처럼 우리가 직접 생활해 보고 ‘이건 도저히 불편해서 힘들다’ 하는 점들은 우리가 개선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특히 하위층 사람들의 주거 환경은 많은 부분이 개선되어야 합니다.

반면 이미 기본적인 건 갖추어져 있는데 더 많은 걸 요구하고 욕망에 껄떡거리는 건 우리로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건 본인들이 알아서 해야 합니다. 이미 정부에서 소 한 마리를 지원해서 우유를 생산하고 있는데, 소를 두 마리나 세 마리를 지원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JTS가 지원해 줄 수 없습니다.

학생들이 스마트 TV가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도 처음에는 JTS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여러 학교를 둘러보고 나니까 만약 교육 지원을 한다면 스마트 TV를 지원하는 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생 수가 100명이 넘는 학교를 둘러보니까 모든 교실에 이미 스마트 TV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골 학교에서는 학교 전체에 스마트 TV 한 대를 설치해 달라는 요구를 한 겁니다. 시골 학교에서는 한 학년에 12명의 아이가 있는데 노트북은 6대밖에 없어서, 나머지 6명은 다른 아이와 같이 쓰거나 옆에서 구경을 해야 해서 노트북 6대가 더 필요하다는 요청도 했습니다. 부탄 정부의 교육 정책이 온라인 수업으로 바뀌었고, SNS 활용을 권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다 보니 그런 시설이 완비되지 않은 시골 학교에서는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갔더니 그곳에는 이미 스마트 TV가 교실마다 다 장착이 되어 있어서 그곳 교장 선생님은 강당에 스마트 보드를 설치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처음에는 스마트 TV도 어떤 장비를 말하는 것인지 잘 몰라서 자세히 물어봤는데, 스마트 보드라고 하길래 처음에는 글씨를 쓰는 화이트보드를 의미하는 줄 알았어요. 그랬더니 그냥 화이트보드가 아니라 스마트 보드가 있다고 해요. 이 정도로 교육 장비 부분에서는 부탄의 기준도 우리나라와 크게 차이가 없을 정도로 올라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육에 대한 요구 사항은 기본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탄의 모든 교과는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영어 유치원처럼 다른 과목을 배울 때도 영어를 통해 배우는 거예요. 수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부탄에서 사용하는 수학책을 봤는데, 책도 모두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를 가르치는 건 알았지만, 이번에 가서 보니 다른 과목도 모두 영어로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국어 과목을 제외하고는 모든 교과가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과 이야기를 할 때는 따로 통역이 필요가 없습니다. 아이들과는 영어로 소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좋은 점도 있지만 앞으로는 고민거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이렇게 공부를 하고 나면 농사도 안 지으려고 하고, 몸을 쓰는 일을 안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데, 시험에 떨어지면 대학교는 다닐 수 없고, 그렇다고 몸을 쓰는 일은 안 하려고 하니까 사회적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시험에 떨어지는 학생들을 위한 직업 훈련이 필요합니다.

또한 어릴 때부터 영어로 교육을 받다 보니까 대부분의 청년들이 해외로 나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외국에 가고 싶어도 말이 안 통하니까 제약이 많은데, 부탄의 청년들은 영어가 되니까 모두 외국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국가 전반적으로 외국에 나가는 열풍이 있습니다. 중앙 정부에 새로 부임 된 공무원들과 이야기를 해봐도 자기가 학교 다닐 때 같은 반에 30명이 있었는데 부탄에 남아있는 친구들이 몇 명이 안 된다고 해요. 공부를 하러 나갔든, 결혼을 하러 나갔든, 일하러 나갔든, 대부분 외국에 나가서 산다고 합니다.

이렇게 계속 유지되면 한 50년 후에는 노인들은 대부분 죽고, 젊은이들은 외국에 나가고, 외국에서 우리 같은 활동가들 몇몇이 들어와서 이 지역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될 겁니다. 그렇게 또 50년이 흐르면 자연환경은 그대로인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인종은 완전히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탄에서는 제가 농담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우리나라도 지금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시골에 있는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외국인들이 들어와서 살겠지 누가 살겠어요?

보건소를 둘러봤을 때도 특별히 지원을 하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사람들을 만나보니 백내장으로 눈이 안 보이는 사람도 많고, 귀가 안 들리는 사람도 많고, 치아가 빠져서 고생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실제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겪고 있는 어려움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사고가 나거나 큰 병이 나거나 비상 상황에서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부탄 내에서 고치지 못하면 캘커타까지 이송해서 치료를 받는 비용까지 모두 정부가 지원하고 있습니다. 대신 실생활 속에서 사람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못해 사각지대가 많은 상황입니다. JTS는 이런 부분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활동을 이어나갈 계획입니다.

농수로를 보수해 달라는 요청도 많았습니다. 우선 있는 시설을 고쳐서 쓰면 되는데, 자연에 노출되어 있는 농수로는 낙엽이 끼면 물이 안 내려가서 봄마다 청소를 해줘야 하고, 또 망가지면 수리해서 사용해야 하니까 주민들이 PVC(폴리염화 비닐) 파이프로 교체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대형 PVC 파이프를 설치하면 아무래도 영구적이니까 편리한 점이 있는데, 대신 환경 문제 부분에서 적합한 선택지가 아니라서 확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시멘트도 이산화탄소(CO₂)를 발생 시키지만, PVC는 염화 비닐(vinyl chloride)이라는 발암 물질을 원료로 사용합니다. 우리가 환경 운동을 하기 위해 부탄에 갔는데, PVC를 설치하는 것이 우리의 활동 방향과 맞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식수로는 오염을 시키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PVC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농수로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이 환경을 고려한 지속 가능한 개발이기 때문에 아직 고민할 부분이 많습니다. 그냥 그들의 삶을 개선시킨다는 것만 생각하면 간단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건 그냥 개발 구호이지 지속 가능한 개발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건 지속 가능한 개발이기 때문에 이렇게 작은 부분까지도 고단한 점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현지 사람들이 ‘이걸 고쳐 달라’, ‘저걸 어떻게 해 달라’ 하고 요청을 하면 아주 작은 것도 직접 가서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주민들에게 필요한 사항인지 살피고, 또 필요한 요구 사항이라고 하더라도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우리의 원칙에 부합하는지도 검토를 해봐야 합니다.

부탄 사람들도 우리가 지원을 하고자 한다고 하니까 이것저것 요구 사항을 내놓았는데, 막상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들 입장에서도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선 부탄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아껴서 쓰고, 마을에 지원을 하더라도 주민과 같이 협력해서 마을을 만들어 나가야 하고, 환경적인 부분도 고려해야 하고, 이러한 조건이 갖춰지면 얼마든지 지원을 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돈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과 조건이 갖춰지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부탄 사람들도 앞서 여러 가지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가 우리의 입장을 듣고 나서는 재고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요구 사항을 말할 때마다 ‘우리가 지원을 할 수 있지만 당신 마을인데 당신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물어보니까, 꼭 필요한 게 아니면 무작정 요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서로 이야기를 통해 풀어나가야 하는 거죠.

부탄 공무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부탄은 지난 60여 년 간 외부 지원이 많이 들어와서 지금까지는 개발 사업만 해온 상황입니다. 그러다 보니 공동체가 해체되고, 사람들이 도시로 많이 빠져나가는 현상이 이어져 왔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우리가 제안하는 지속 가능한 개발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는 ‘부탄도 원래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기존의 방향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무조건 좋은 것으로 바꾸는 것만 생각했다’ 하고 반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합니다. 부탄 곳곳을 다 점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우리의 역할은 원칙을 갖고 샘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원칙과 샘플을 기준으로 삼아서 다른 곳에 확장시키는 것은 부탄 사람들이 해야 할 몫입니다. 부탄에서 하고 있는 지속 가능한 개발 사업은 이런 방향을 갖고 진행해 나갈 계획입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밤 9시 30분이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걷고 대화를 나누었더니 피곤함이 몰려왔습니다. 모두 졸린 눈을 비비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공동체 대중들은 법주사를 순례한 후 봄나들이를 마무리하고, 저녁에는 서울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해외에서 정토회를 개척했던 초창기 활동가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대화의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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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정

감사합니다.

2024-05-03 08:47:36

김숙경

_()_

2024-04-22 13:27:40

임영현

오늘 내용은 즉문즉설, 시대에 요구에 탄생한 미륵 사상, 평화와 대통합 그리고 지속가능한 발전 그리고 부탄에서 인류에게 제시할 모델에 대한 스님의 고민 등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냥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입니다. 고맙습니다🙏

2024-04-19 17: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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